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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

어느 날의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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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은 일과 내면의 상태를 모두 기록하고 싶지는 않다. 그래봤자 지나고 나면 사소해지는 일들이고 꿈 속의 허상과 뒤섞여 기억 속에 침잠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더 낫다. 최근엔 빗속에서 책을 읽고 자주 공상에 빠졌다. 새로운 시를 쓰기 보다 예전에 쓴 시들을 자꾸 고쳤다.

 

이사 오고 처음 집 근처 절에 갔다. 절은 언제나 가고 싶은 곳이다. 예전엔 절에 살고 싶다고 자주 말했었다. 내게 절은 그런 곳이지만 편의점 드나들듯 자주 방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 공간에 일부러 갈 만큼 고요해지고 싶은 순간이 찾아왔다고 느껴서 아껴뒀던 와인을 따는 마음으로 갔다. 도심 속 조계종 사찰들의 분위기는 조금씩 닮았다. 개방된 듯 폐쇄적이고, 시끌함 속의 정적을 잘 유지하고 있는 풍경. 메인 전각으로 올라가는 길목에 돌로 된 관세음보살님이 있었다.

 

계속 기억에 남는 장면은 여기서다. 날개를 다쳤는지 한쪽 날개를 접지 못하고 끌고 있는 비둘기 한 마리가 석상 곁을 맴돌고 있었다. 눈에 띄는 날개의 부상 외에도 전체적으로 상태가 좋지 못한 새였다. 관세음보살은 키가 진짜 크고 머리도 크시고 거대하고 우뚝한 인상이었는데 발밑에 있는 다친 비둘기는 거길 떠나지 않고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있는 것도 아니고 쉬지 않고 종종거리며 맴돌고 있었다. 사람들이 자주 드나들어서 그 옆 풀속이 훨씬 안전해 보이는데 그 새는 인지능력이 떨어진 건지 그 곁이 제것이라는 듯 가까이 가도 비켜주지 않을 기세로 지키고 있었다. 사람은 나 혼자밖에 없어서 "네 엄마니?" 라고 말을 걸었다.

 

신비로운 종교적인 이야기로 포장할 능력이 안된다. 그렇지만 내가 그날 그곳에 간 과정과 그 새가 그곳에 자리잡게 되었을 경로가 얼마나 겹치는지 상상해 보았다. 그냥 거기 물이 흐르는 샘터가 있어 물을 얻으러 지나가다 돌바닥이 시원해서 거기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실은 나도 대단한 사연을 가지고 그곳을 찾아간 것은 아니었고, 무언가를 얻을 셈으로 간 것도 정말 무엇을 얻어가는 것도 아니었기에 더 그 때 우연히 본 것을 기억하고 싶다. 각자 생의 어떤 지점에서 관음보살님을 찾아간 중생들이 적어도 그 앞에서는 종간 구분 없이 진 짐의 무게가 평등한 것처럼 느껴졌다.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알 수 없는 평온함을 얻은 어떤 오후였다.

 

그날 꾼 꿈은 특이했다. 집의 모든 틈과 구석에서 온갖 종류의 발달린 연체동물들이 기어나왔다. 평소에 먹지도 좋아하지도 않는 문어 낙지 쭈꾸미 등. 걔들의 미끌거리는 피부 질감, 동글동글한 눈들과 빨판들이 선명히 기억난다.

 

흘러넘치는 미끌미끌과 동글동글 가운데 서서 손으로 마구 퍼 한곳에 모아두었다. 아무리 뽑아내도 끊임없이 흘러나왔다. 감당이 안될 지경이 되자 허공에다 얘들을 어쩌면 좋냐고 소리쳤다. 꿈에서 깨 일어나니 밖엔 비가 많이 내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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